이와이 슌지 소설 러브레터

2018. 6. 3.

최근에 심각한 소설을 연달아 읽었더니, 주변이 축축하고 그늘진 것 같았다. 그래서 양지바른 땅처럼 뽀송뽀송한 연애 소설이 읽고 싶었다. 막상 연애 소설을 찾으려 하니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겠더라. 인터넷 서점 장르별 검색을 해 보아도 원하는 소설을 찾지 못해 내가 읽었던 작가의 것을 찾다가, 《립반윙클의 신부》를 쓴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가 소설로 있길래 선택했다.


영화로 세 번, 네 번 보았는데, 볼 때마다 좋았던 로맨스. 이와이 슌지 감독이 소설을 먼저 쓰고 난 뒤에 이를 영화로 각색했다고 한다. 물론 TV 드라마 감독으로 활동하던 중에 쓴 소설이니, 영상과 음악을 머릿속으로 세세하게 그리며 소설을 썼겠지만, 어쨌든 소설이 원작이다.


이와이 슌지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이와이 슌지는 늘 《러브레터》의 그늘에 놓인 것 같다. 신작 영화가 개봉하면 꼭 ‘《러브레터》 감독, 이와이 슌지’, 로 소개되기 일쑤니까. 그만큼 《러브레터》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린 영화다. 그리고 러브레터는 줄곧 '첫사랑'의 풋풋한 설렘을 상징하는 영화로 소개된다.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 기억이, 그것도 사랑에 관련된 감각이 되살아나면, 겨울 코트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발견한 것처럼 한나절 마음이 밝다. 그 사람이 내 첫사랑이다, 라고 확신하며 말하는 타입의 사람이 있지만, 나의 경우는 그 애가 첫사랑이었나, 저 애였나, 아니면 쟨가, 라며 쉽게 답하지 못하는 타입이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첫사랑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못 잊는 사람도 없는 한편, 아무도 잊을 수 없기도 한 난처한 입장이다. 그저 한 명씩 떠올려 보면, 그때의 내가 귀여워서 후후 하고 따뜻한 웃음이 난다.


러브레터의 주인공, 이츠키 역시 첫사랑이 누구인지 콕 집지 못하는 맹숭한 타입이다. 동성동명인 중학교 이성 동창에게 전해져야 했을 러브레터를 받고, 그와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같은 이름이라는 이유로 중학교 3년 동안 서로 엮이고 놀림받은 기억은,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이라지만, 점점 또렷해질수록 뭉클 또 뭉클하다. 하지만 끝까지 그 감정이 사랑임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 맹숭한 이츠키.


영화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조금 다르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가 학창시절 도서카드 뒷면에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학생들에게 전해 받는다. 소설은 놀란 마음에 초상화를 감추려하지만 주머니가 없어서 당황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반면, 영화에서는 히로코에게 그 일을 편지로 적어 보내려다 마음이 아파 보내지 못하겠다는 독백으로 끝난다. 영화와 소설이 가진 각각의 특성을 살려 둘 다 좋지만, 어쩐지 자신을 좋아하던 소년의 마음을 알고 어찌할 줄 모르는 장면으로 끝맺은 소설이 첫사랑다워 더욱 마음에 남는다.


*영화와 소설의 마지막 내용은 같은 걸로 재확인하여 내용을 정정합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히로코가 러브레터를 보내지 않았다면― 이츠키는 영영 그 소년이 자신을 좋아했던 걸 몰랐을까. 히로코가 떠나 보내는 그의 기억이, 이츠키에겐 선물 같은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는 히로코의 대답 없는 메아리가 마음속 멀리 울려 퍼진다.


만약 야스요가 말한 대로 국도가 되어 있다면 절대 배달될 리가 없다. 어디에도 갈 곳 없는 편지. 어디에도 가지 못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이 세상에 없는 그에게 부친 편지니까.

후지이 이츠키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낸답니다.

와타나베 히로코